6주동안의 사격훈련연습동안 단 12발의 실탄을 지급하면서도 총기(실탄)관리가 매우 심했다. M-1 소총을 가지고 제식훈련을 받거나 하는날에는 소총을 지급받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무반에 소총을 정렬해놓는 총기대위에 놓아두기 전에 노리쇠 뭉치를(사격을 하게되면 이 노리쇠 뭉치가 앞으로 전진하여 실탄의 뇌관을 타격함으로써 실탄이 발사되게 하는 역할장치) 따로 분리시켜 수집해 놓아서 총기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곳이었다. 알고보니 얼마전에 훈련병중의 한명이 훈련소 조교의 부당한 기합에 울분을 참지못하고 사격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실탄을 감추어가지고 와서 내무반에서 조교를 향해 발사한 총기사건이 있어서 그 이후부터는 철저하게 사전 방지를 하게 되었다.
사격연습장에서도 안전관리를 위한 훈련과 연습이 반복되었고, 최종적으로 연습사격을 할때는 사격을 하는 사수와 옆에서 도와주는 부사수가 2인1조로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사수 오른쪽 옆의 약간 뒤쪽에 위치한 부사수의 역할은 사수가 실탄을 쏘고나면 옆으로 날아다니는 탄피를 수집하는것이 주목적이었다. 만약에 6발의 실탄을 수령하였으면 사격이 끝난후에는 6발의 탄피를 정확하게 반납하여야 하는데 만약에 반납탄피 수량이 지급받은 숫자보다 단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날은 모두 다 찾을때까지 부대로 귀환을 못한다. 그래도 못찾게되면 그날부터 총기관리에 대한 규제는 진짜 살벌해진다.
6주간의 신병훈련기간도 한달이 지나 이제 수료하기까지는 2주도 채 안남은 7월 초순의 어느 날! 그날도 훈련소 5주차의 교육예정에 따라서 사격연습동작을 반복하는 소위 피가나고 알이 배긴다는 PRI 교육장에서 고된훈련을 하다가 조교의 10분간 휴식! 소리를 들으며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조교가 일간신문지 한장을 가지고 오면서 너희들에게 기쁜소식을 하나 전해 주겠단다. 듣고보니 당시에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한민국 권력의 2인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 면담하고 돌아와서 이것을 발표하는 소위 7.4남북공동성명 발표뉴스였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신문이나 TV의 뉴스도 철저하게 보안검열을 거친후에 발표되는 시기였으며 북한은 무서운 공산당으로서 단 한마디라도 북한을 찬양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검정찝차에 태워 끌고가서 행방을 모르는 일이 허다한 정국이었기때문에 이후락 중정부장이 평양에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회담을 하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것은 대한민국 전역, 아니 세계를 뒤집어 놓을만한 깜짝 뉴스였다.
이 뉴스를 접한 훈련병들은 모두 두손을 높이들고 만세삼창을 하였다. 이제 3년중에 고작 1개월의 세월이 흘러간 군대생활이 곧 절반이상으로 줄어들것 같은 들뜬 마음으로....ㅎㅎㅎ 그러나 결과는 나 역시 다른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만 3년을 모두 채우고 만기전역하였다.
1972년 7월 중순, 6주간의 힘든 훈병생활을 모두 마치고 드디어 퇴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퇴소식을 마치고 대부분의 신병들은 후반기교육을 위한 부대로 가기 위하여 다음행선지로 가기위해 논산(연무대)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도 북쪽으로 가기위해 용산역으로 가는 군용전용열차를 타고 우리가 타고있는 차량에는 주로 특수병과(?)들이 타고 있었다. 보안사로 차출내지는 빽이 좋은 신병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는 기행병으로서 후반기교육을 하지않고 곧바로 자대에 배치받아서 가는 내가 배치받은곳은 이제껏 보도듣도 못한 전통사(전략통신사령부)라고 하는 부대였다. 부대 사령부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채 용산역에서 하차하여 당시에는 용신역앞에 용사의집이 없었고 수도권 으로 배치되는 병력은 구로동(당시에는 서울시에 편입되지 않은 시외곽)에 있는 206 보충대에서 대기를 하다가 같은곳으로 배치받은 병력 여러명과 함께 전략통신사령부가 있는 과천으로 가서 다시 예하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육군정보대인 MIG(Military Intelligence Group)라고 불리우는 첩보부대였다. 이곳에 작전배속으로 속한 우리 부대는 육군항공사진제작중대(이하 항사중대)로 이 부대의 임무는 당시에 미군정찰기가 북한지역에가서 높이떠서 항공사진을 촬영해오면 필름을 현상, 인화하여 넘겨주면 이곳에서 북한의 지형과 시설들을 정밀 분석하는곳이다. 당시 부대의 위치는 이태원에서 녹사평대로를 따라 반포대교로 가기전에 미8군의 후문 맞은편지역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부대 배치 받은지 2개월도 채 안되어서 이 부대를 통합하여 육군정보사령부(Army Intelligence Command)로 창설되면서 장소도 당시에는 동작동에서 조금지나 이수교 다리에서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는 야산지대가 있는곳에 부대간판이 아닌 0000공사 라고 하는 이름으로 겉에서 보기에는 군부대가 아니고 일반 회사의 건물같이 지어졌고 인근으로는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었디.
이제 이곳에서 나의 군생활을 시작하고 제대할때까지 마쳐야 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서울인근에서 군대생활하면서 특수부대에 있으니까 소위 말하는 특과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일반군인들처럼 육체적인 훈련같은것은 없었지만 그대신 소위 말하는 내무반 군기는 아주엄해서 졸병시절에는 매일밤 소위 말하는 엉덩이에 빳다를 맞지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올정도로 힘든 졸병생활이었다. 그대신 고참이 되면 신과 동급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름 군대내에서는 최고의 편리함과 편한함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에 최고참인 제대병장들의 군번이 소위 말하는 와리바시 군번이라고도 하는 맨앞자리의 숫자가 11로 나가는 11xxxxxxx 군번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아침에도 늦게까지 취침하고 기상하면 겨울에도 졸병들이 세수대야에다가 따뜻한 물을 떠다 바치면 앉은자리에서 세면하고 취사장에서 졸병들이 밥만 식판에 가져와서 주로 사제반찬(외부에서 반입해온 반찬)으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떠받치면 잡수시고 낮에는 하루종일 독서나 잡담, 기타 장기나 바둑으로 소일하는게 그들의 일과였다.
부대의 명칭은 육군항사중대로서 당시에는 대한민국 군대에서 유일하게 중대단위의 독립부대였다. 중대라고해도 인원은 100명도 채 안되는 적은 숫자이고 육군대위가 최고위급 지휘관으로 부대의 장에게 지급되는 전용찝자도 있었고, 그밑에 부관으로 중위와 인사계인 선임하사인 상사가 한명 있었을뿐 나머지는 모두가 일반사병이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의 주특기가 사진병과였다. 대부분 대전통신학교에서 사진반을 수료하였기 때문에 통신학교 기수 군기가 살벌했는데 나는 기술행정병 출신이라 대전통신학교를 거치지않고 바로 자대에 배치받은 특수병과(?)이고 그것도 진짜 기술이 있던것이 아니고 논산훈련소에서 920(사진병)양성 주특기를 받았지만 기술병이라 바로 자대배치를 받은 엉터리 주특기였다. 그리고 부대에는 진짜 사진전문가 사병들이 많아서 내가 안해도 사진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잘 돌아가고 있어서 나의 하루의 일과는 고참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돌쇠 역할이었다.
고참들의 세탁물을 빨아서 취사반에서 얻어온 짬밥으로 군복을 빳빳하게 풀을먹여서 다리미질을 해놓고 속옷도 세탁하고, 고참병들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군화를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광이나게 닦아놓고, 때로는 당시에 바둑을 아마추어 3~4급 정도 두었기때문에 고참들과 대국하는 영광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바늘방석같은 일이었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참들이라 오라고 해서 가면 그들에게는 귀염을 받으면서 앉아서 함께 대국을 하지만 나머지 나와함께 군대생활을 오래 해나갈 일병이나 상병같은 중고참들에게는 눈의가시 같은 존재라고도 할수 있었다. 이제 막 전출해온 최말단 졸병이 고참들과 앉아서 3~4시간씩 바둑이나 두고 있는동안에 자기들이 내대신에 나의 해야 할일들을 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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