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6월 10일! 초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결혼 1년도 채안된 20대 중반의 신혼부부는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커다란 대형이민가방 4개를 가지고 김포국제공항 출국장 대합실에서 30여명에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여도 해외로 간다는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고 공항에서 커다란 비행기 구경을 하는것도 진기한 풍경인지라 누가 해외로 출국한다고 하면 한명 또는 한가족이 출국하는데 거의 1개소대급의 인원에 가까운 수십명씩 공항 대합실에 나와서 출국하는 지인을 배웅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또 정부에 외화가 귀하던 시절이라 $(외화)반출에 많은 제약이 있어서, 우리야 없어서 못가져 가지만 재산이 있어도 전가족이 이민을 간다고 해도 겨우 $1만불 미만의 외화만 가지고 나갈수가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있던 전재산을 환전해봤자 $5천불도 안되는 돈을 가지고 젊음이라는 패기와 용기를 가지고 김포공항을 떠나는것이었다.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는, North West Air로 미국국적기, 당시에는 국적기인 대한항공이 미주노선을 개설한지도 몇년 안되는 빈약한 항공사인데다가 미국까지의 직항노선은 어느나라 항공사도 없었다. 그만큼 항공기의 연료를 가지고 한번에 태평양을 건널수 있는 항공산업의 발달이 안되어 있을때였다. 대부분의 미주노선은 항로가 김포-도쿄(하네다)-하와이(호놀룰루)-미서부(LA or San Francisco)의 항로였다.
많은 환송객들과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한채 출국심사대 안으로 들어가면서 서로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때까지 바라보다가 모든 수속을 마치고 미지의 땅에대한 기대와 언어와 문화가 다른곳에서의 생활에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태운 커다란 항공기는 김포공항을 이륙한지 2시간여만에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경유하는동안 항공기 정비도 하고 일본에서 다른 승객들도 태우는것 같았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되어도 환승구역에서 비행기탑승이 조금씩 늦어진다. 방송을 통하여서 출발이 지연된다고 하면서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더니 급기야는 식사 바우처를 승객들에게 지급해준다. 이것은 지연이 더 되어간다는 뜻이었다. 어찌되었든지 우리는 바우처를 받아가지고 식당에가서 우동 한그릇씩을 맛있게 먹고나서도 한참을 기다리니 탑승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른 오후에 김포를 출발한 항공기는 거의 자정이 가까워서 다시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여 캄캄한 태평양 바다를 날아서 호놀룰루를 향하여 Go~Go! 정확하게 5시간 정도 딜레이 되었다. 하와이까지는 거의 10시간 가까운 비행을 해야하고 우리는 하루종일 출국심사와 기다림으로 인하여 피곤해진 눈을감고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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