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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군대이야기(미육군 8년 & 한국군 3년)

드디어 인생 3번째의 군입대 마지막편 (제대)

by Diaspora(복수국적자) 2023. 8. 24.

   1986년 5공당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학생들의 항쟁이 데모로 이어지고 서울시내에는 최루가스 냄새가 하루도 그칠날이 없을때였습니다. 매일아침 출근하면 8군 상황실에서는 오늘은 00대학교 앞에서 시위가 있을 예정이니 특히 VIP 차량들은 그지역으로 가지말고 우회를 하여 가라던가 하는 주의사항이 매일아침 장군사무실로 오고는 했습니다. 1987년 당시 민주정의당의 대표이던 노태우씨가 6.29 선언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 서울시내를 운전하고 나갈때는 살얼음판 같았습니다. 한참 Anti America와 "양키 고~홈"을 외치던 시대인지라 장군을 태우고 운전을 할때는 안에서 자동차문을 꼭 잠그고 하지만 신호등 앞에서 대기할때 저의 차가 제일 앞에서 있을때 횡단보도로 많은사람이 건너갈때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혹시라도 데모대가 돌맹이를 들고서 차량 유리창을 깨뜨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용산에서 장군과 함께하면서 생긴 일화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한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워커힐 호텔에서 한국측에서 주최하는 모임이 있어서 미군장성들도 모두 그곳에 초청을 받아서 가는데 당시 새로 개통한 88 올림픽 강변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워커힐 입구가 가까운 천호대교 근방에 도달하니 차들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도 못하고 거의 주차된 상태로 트레픽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모임시작시간은 임박해졌고 지금부터 차량통행이 풀려도 모임에 지각은 뻔한것이었지만 저의 차량만 그런것이 아니고 다른 장군들이 타고가는 차량들도 그곳에서 빠져나가지를 못하니까 다같이 지각이라 마음은 놓였습니다. 옆에 타고있던 장군도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저는 장군에게 제가 아는 뒷길이 있으니까 여기에서 로컬길로 나가서 가도될까요? 했더니 네 마음대로 하라는 명령에 저는 조금 더가서 제일먼저 나오는 진출로로 빠져나가서 제가 기억하는 당시의 건국대학교 인근의 화양리쪽에 있는 워커힐 후문으로 갔습니다.   
 
  후문 입구로 가자 진짜 트레픽이 한가로웠습니다. 진짜 나의 판단력은 이럴때 제대로 진가를 발휘 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며 후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입니까? Wrong Way(Do not enter)라고 빨간바탕의 하얀글씨도 선명하게 세워져있는 싸인판이 보이는데 순간적으로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현기증이 나는데, 장군도 이미 상황판단을 하고있지만 그냥 묵묵히 앉아서 있고, 임기응변과 잔머리 굴리는데 도사인 제가 장군에게 넌지시 한마디 던졌습니다. Sir! Don't worry. Be happy.(속으로만..ㅋㅋ) 그리고는 차를 180도 돌려서 트렁크 쪽을 후문방향으로 해놓고 비상용 깜빡이를 켜고서 Back-Up(후진)으로 운전해 들어갔습니다. 절대 불법이 아닙니다. 아닌것 맞지요? ^^ 다행스럽게도 원웨이가 끝나는 길에 도달할때까지 차량이 한대도 오지를 않아서 무사히 모임장소에 도달해서 보니 약속시간보다 30분 이상이나 늦었지만 8군에서 오는 장군차량들 가운데는 선착순 1번이었다는... 나중에 장군 왈 "Sergeant. Yoon! 내가 만약에 미국에 가서 책을 발간하면 너의 운전경험이 5~6 페이지는 나올거라고 하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첫번째 이렇게 모시던 장군은 임기가 끝나고 사단장의 보직을 받고 본토로 돌아간후에 나중에 1990년대 중반에 육군대장이 되어 미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새로온 장군이야 전임장군에게 저에 대한 얘기도 익히 다들어 알고있는지라, 저의 임무는 모시는 장군만 바뀌었을뿐 가끔 저녁늦게 장군이 8군영외로 모임이 있는날 외에는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칼퇴, 그리고 주5일 근무에 한미연합사인 관계로 한국의 공휴일도 저는 함께 공휴일로 지내는 특과중의 특과병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느덧 두번째 군대복무 계약 Term(기간)인 4년이 거의 다가옵니다. 복무기간이 끝나기 몇개월전에 미리 통보를 하여 다시 복무연장계약을 하던가 아니면 제대신청을 해야하는데 저에게는 많은 생각이 뒤따라 옵니다. 일단은 교회생활이 너무 깊게들어가서 하다보니까(그동안에 집사 안수도 받았습니다) 교회의 중직도 맡아서 하는데 교회의 중요한 회의에서는 저는 한발 뒤로 물러나서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국에서의 근무가 끝나면 이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더이상 깊이있게 관여를 안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저의 신앙관에 많이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섬기려면 뼈가 묻어서 나갈정도의 진정성있는 봉사를 해야하는데 라는것이 저의 개인적인 신앙관이었습니다. 글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미군은 은퇴(제대)를 하여 연금및 기타 건강보험 등의 혜택을 받으려면 최소한 20년 이상의 복무를 한후에 제대해야만 혜택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19년을 해도 안됩니다. 아무 혜택이 없습니다. 저의 연령을 생각해보니 20대후반에 입대를 했기에 최소한 20년을 마치고나면 50살이 거의 다됩니다. 젊은 미국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입대해서 20년을 채우면 40세가 되기도전에 은퇴를 할수도 있어서 새로운 직업을 찾기가 수월하지만 저는 50세가 넘어가서 새로운 직업을 찾는것도 다른사람들보다 어려울것 같고 그렇다고 20년 복무하고 받는 연금이 제대할 당시의 기본 봉급수령액의 50%밖에 안되어서 계산상으로는 매월 아파트 렌트비 정도밖에 안되는 금액이 될것 같았습니다. 한국에서의 근무는 제가 원한다면 20년을 채울때까지 있는것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저의 직업(보직)상 그대로 계속 있어주는것이 장군들을 위해서는 최선이니까요, 저만 생각하면 한국에서 편하게 군대생활하다 은퇴하면 좋은데 저의 어린 남매들의 교육과 앞으로의 신앙생활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더이상 연장하지 말고 제대를 하기로 하여 많은사람들이 깜짝놀라는 가운데(모든사람들이 제가 그자리에 있으면서 미국으로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그런 직책과 자리였든지라) 후임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많은 김치 GI들이 서로 자기를 후임으로 얘기해 달라고 하는가운데 같은 종씨인 Yoon을 후임으로 세워놓고 1989년도 4월에 미국의 San Francisco에 있는 부대로 와서 제대를 하고 인생의 3번째의 군복무를 마감하고 그때부터 어려움도 있었지만 믿음으로 이겨나가며 몇년후부터 자영업을 하면서 또다시 새벽별보기 운동으로 한국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1989년부터 2016년 가을까지 28년동안 한국도 못나가고 미국내의 국내여행도 제대로 못했지만 89년도의 과감한 선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것이 위에 계신분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순종하며 따라간 결과는 2% 부족한 아메리칸 드림과 함께 해피엔딩으로 역이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3번의 군대입대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은 저의 미군제대 증명서류입니다.

왼쪽서류가 첫번째로 81년 1월 27일~85년 1월 26일까지 4년복무하고 제대한후 3개월전에 재입대한 서류(오른쪽)에는

85년 4월 19일~89년 4월 14일까지 3년 11개월 26일을 복무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