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글 부터는 저의 개인적인 신앙간증이 내용중에 조금씩 들어가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불편하신분들은 읽지마시고 그냥 통과하셔도 괜찮습니다.^^
1985년도 8월의 어느날, 전에 근무하던 의무대대의 대대장이 노트장에 친필로 써준 편지한장을 잃어버리지 않게 보물단지처럼 중요서류와 함께 손가방속에 넣고 드디어 CA주의 Travis 공군비행장에서 군용수송기를 타고 10여시간의 장거리 비행끝에 한국의 오산비행장에 도착하여 한국의 세관원도 참석한 입국장에서 간단한, 형식적인 세관검사를 거쳐 검정(?국방)색의 대형 군용버스를 타고 다시 눈에 익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용산 미8군 보충대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것이 새로웠다. 군대에 재입대하여 원치도 않았지만 그리던 한국땅에 와서 그것도 용산의 8군병원에서 100% 근무가 보장된 비밀결사대의 밀정이 가지고 가는것 같은 편지를 품에 안고가는데, 아마 제3한강교쯤 건너가는데 트레픽이 매우 심하였다.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대로상에서 잠시 멈추어 섰는데 창가로 내다보이는 바로 옆에는 시내버스가 함께 정차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내손을 내밀면 옆에 정차해있는 시내버스의 승객과 악수를 할수있을 정도로 바짝 붙어있는것을 보면서 어찔했다. 어찌되었든지 나의 병과는 트럭운전병인데, 거기에다 한국에서의 운전경력은 전혀없는데 그것을 아시는 위에 계신분이 이렇게 다른병과로 편하게 근무할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해 주셨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이 또 솟구쳐난다.^^
용산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충대에 서류를 제출하기전에 영내에 있는 영업용택시(아리랑택시)를 타고 용산의 121 병원으로 먼저 달려갔다. 부원장이 소속되어 있는 근무처의 한 사무실로 들어가니 어떻게 왔냐고 묻기에 부원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그 사무실의 책임자인 주임상사에게 안내를 해준다. 주임상사에게 부원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지금 휴가중이시니까 2주후에 다시오면 만날수 있다고 하기에 나는 다급한 마음에 비밀편지를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더니 자기는 어떻게 할수없고 부원장님이 돌아오시면 이곳에서 틀림없이 근무할수 있게될테니까 2주후에 다시오라고 하는데, 그러자면 보충대에 서류를 제출하고 급하게 비상휴가를 청원해야하고 등등의 귀찮은 일들때문에 어떻게 잘되겠지 하는 마음(위에 계신분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지 하는믿음?)으로 전입서류를 보충대에 제출하고 나니까 2~3시간후에 다시 부대배치명령서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일?... 다시 동두천의 제2사단으로 명령서가 떨어졌다. 아~잠깐동안이지만 천국과 같은 환경에서의 보직을 꿈꾸다가 다시 나락으로 떠러지는것 같은 절망감이란......
다시 군용버스를 타고 동두천으로 발령받은 군인들과 함께 동두천으로 향하는데 마음속에서 다시 감사함과 마음의 안정이 찾아들었다. 아~ 위에 계신분이 내가 서울에서는 운전경력도 없이 운전하는게 매우 위험한것을 아시고 트레픽이 많지않고 운전이 수월한 동두천으로 보내주시는구나 하는 감사가 솟아나왔다. 지나고보니 이때부터 나에게는 내면 깊숙한곳에 그분이 자리잡고 나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동두천에 도착하자, 마음은 다시 사단본부에 군용물자를 운송하는 많은 트럭이 있는 대대본부가 있으니까 그곳으로 배치가 되겠지 하는데 막상 다시 뚜껑을 열어보니 말단 보병대대로 발령이 났다. 동두천 사단본부도 아니고 경기도 봉일천에 주둔하고 있는 2사단 3여단 소속의 그것도 2사단에서는 3개월에 한번씩 순번적으로 자유의 다리안에 있는 캠프에 가서 근무를 맡게되는 최전방의 1/31 보병대대였다. 그나마 동두천 사단본부에서 근무하겠지 생각했는데 다시 그보다 더 깊숙히 전방으로, 한국군에 근무할때도 근처에 구경도 못해본 DMZ 안의 텐트촌으로 3개월을 들어가야하는 상황에서 다시 순간의 절망감이 감사함으로 변하는것을 느꼈다. 그래 내가 가보지 못한 최전방에 공기좋은곳에 가서 사슴같은 야생동물도 구경하면서 건강하게 근무를 하라는 뜻이 담겨있겠지 하는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있으며는 남매를 데리고 한국으로 나올 가족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DMZ로 들어가면 3개월 동안은 꼼짝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 가족들이 한국에 오기전에 거주할 집도 구해야하고 여러가지 준비할것도 많은것을 생각하고 있는가운데 여단본부에서는 여단장인 육군대령의 김치 GI 운전병이 언제라도 필요할지 모른다고 해서 줄을 대어서 혹시 필요할때는 불러달라고 얘기를 해놓고 기다려보는데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는것도 아니고 현재 나같은 한국계 운전병이 근무를 잘하고 있는데 운전병의 자리가 공석으로 나올수가 없었다.
당시에 여단장의 운전병이 두명인데 한명은 군용찦차 운전병으로 영어를 잘하는 본토박이 미군이었고, 또 한명은 세단 운전병으로 한국군과 기타 한국의 민간인도 만나는 자리에 가야하기때문에 한국말도 하고 지리도 잘아는 나같은 김치 GI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일병 계급을 달고있는 한국계 미군 GI가 운전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자리였다. 내가 속한 보병대대는 드디어 보따리를 싸가지고 DMZ내의 캠프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나도 개인 장비를 모두 트럭에 싣고서 생전 처음으로 자유의 다리를 건너서 부대가 앞으로 3개월동안 상주할 캠프에 도착하여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데 본부대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개인장비를 다시 챙겨서 여단본부로 가서 주임상사에게 보고를 하라고 한다. 영문도 모른채 일단은 짐을 모두 싸가지고 다시 봉일천의 여단본부 사령부로 가서 주임상사를 만나보니 부대전출명령서를 여단본부로 만들어놓았으니 중대본부에 가서 빨리 전입신고하고 내무반을 배치받는 등의 준비를 마치고 오라고 한다. 알고보니 여단장이 괘팍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세단을 타고 동두천 사단본부를 다녀오다가 세단을 운전하는 한국계 GI가 나처럼 영어도 서툰데다가 여단장이 운전할때 자기의 지시대로 하라고 하였는데 제대로 듣지를 못하고 운전하는 바람에 위험한 순간이 있었는데 화가난 여단장이 오는 중간에 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운전병은 길가에 내려두고 자기가 직접 운전해서 여단본부로 돌아와서 새로운 운전병을 빨리 구해 놓으라고 젊은 한국계 부관인 미군중위에게 소리소리 지르자 부관은 주임상사와 상의한 끝에 몇명의 후보가운데서 내가 선택되어서 나는 졸지에 말단 보병대대의 트럭운전병에서 지역사령관인 여단장의 세단 운전기사가 되었다. 다시한번 절벽끝까지 떠밀으시며 뛰어내리라고 해도 감사함으로 순종을 하는가 하고 시험을 하셨나보다. 나락의 끝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잃지않고 견디어 냈더니 드디어 절벽끝에서부터 마지막 순간에 부대내에서는 나에게 필요한 가장 좋은 보직을 주시다니...
위에 계신분의 섭리가운데 각본에 짜여진듯 틀에 맞추어서 최전방 일선부대에까지 들어갔다가 마지막 벼랑끝에서 건져 올리시고, 생각지도 못했던 지역사령관의 운전병으로 발탁을 해주신것을 생각하면서 성경속의 요셉이 생각이 났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서 감옥에도 들어갔지만 감사로 순종을 하다가 차츰 좋은자리로 올라가다가 최후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의 이야기가.....
여단장의 세단을 운전하면서 부터는 전방부대에서의 또다른 특과병의 생활의 연속이었다. 여단장이 주로 세단을 타고 가는곳은 인근에 있는 한국군의 사단장들을 만나거나, 또는 일과후에 지방의 유지들이나 한국의 민간인들을 만나서 한국적인 회식자리에 가는 일이 많아서 나는 밤늦게까지 근무를 하기도 하기때문에 군대내의 매일새벽 점호라던가 구보 또는 어떠한 훈련도 하나없이 오직 여단장이 화나지않게 비위만 잘 마추고 운전만 안전하게 하면 되는것이다. 미국에서 가족들이 언제쯤 도착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미리 부대주변에 있는 연립주택 하나를 전세로 얻어놓고 간단한 세간살이를 준비해놓고 김포공항으로 마중나가는날, 여단장에게 가족들이 김포에 도착하기때문에 잠시 시간을 내서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여단장이 직접 행정반에 연락해서 부대에서 군대 벤을 하나 준비해 주라고 하면서 타고가서 가족들을 데려 오라고 하는 특전을 받을 정도로 신임도 얻은가운데 가족들을 상봉했습니다. 몇개월만에 공항에서 만나는 2살과 4살의 아이들 가운데 2살짜리 딸아이는 아빠를 보더니 수줍어서 엄마뒤로 숨어버리기도 하면서 행복한 봉일천에서의 군대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교회생활은 진짜 열심히....
하지만 신앙생활에 열심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교회생활과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것들도 많았습니다. 하루는 주말에 여단본부에 근무하는 한국계 김치 GI 3~4명과 함께 BBQ 파티를 하기로 하고 인근의 일영 유원지에 가서 민박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당시에는 그때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사회의 오락중의 하나인 국민오락! Go~Stop을 빼놓으면 말이 안되잖아요! 당시에도 머리를 사용하는 게임이라면 언제나 승률이 70~80%는 되었으니까 밤새도록 새벽녁 늦게까지 하다가 잠들이 들었다가 오후나 되어서 늦게 기상을 하고보니 그날이 주일인데 예배를 참석못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그렇게까지 몰랐지만 어찌되었건 오전예배는 불참을 했어도 저녁예배라도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일행들을 남겨두고 저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초신자라 아무것도 몰라서 세상의 쾌락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주일낮 예배도 빠트리고 놀았지만 저녁예배라도 참석해서 주일을 성수하겠다는 그 마음을 예쁘게 보아주셔서 오늘날까지 은7기3(은혜 70% 기도 30%)의 생활속에서 인도하여 주셨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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